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터널 씬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국내에 DNA 검사 장비가 없어 미국에까지 검사를 의뢰했지만 끝내 불일치 소견서를 받아들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형사가 결과를 부정하며 용의자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었는데요. 온갖 고생 끝에 자신이 그려왔던 유력 용의자를 검거했음에도 증거가 없어 놓아줘야만 하는 형사의 심정을 일면 이해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습니다. 화성 사건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됐던 케이블드라마 ‘터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본 드라마에서는 사건을 해결할 증거로 만년필이 등장했었는데요. 30년 전 과거에서 타임슬립한 형사가 증거물인 만년필을 다시 과거에 두고 와버렸지만, 그 사이에 태어난 딸이 만년필을 잘 보관해둔 덕분에 범인을 검거한다는 게 줄거리였습니다. 결국 증거 유무에 따라 두 작품의 결론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죠. 만약 화성 사건이 현 시대에 발생한다면 곧바로 검거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미세한 증거들, 예를 들어 현장에 남겨진 머리카락이나 담배꽁초를 통해 범인의 DNA를 수집하고, 곳곳에 설치된 CCTV와 차량 블랙박스를 통해 수사망을 좁힐 수 있었다면 끝끝내 공소시효 만료사건으로 남았을 가능성은 희박했을 텐데요. 특히 최근 수사기관의 증거 수집능력은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범행 증거 수집에 활용하는 ‘디지털 포렌식’ 기법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다소 척박한(?) 환경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온 국민을 경악에 빠뜨렸던 인천 초등생 살인 사건에서도 바로 이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가해자의 거짓말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07/0200000000AKR20170407068751065.HTML?input=1195m 디지털 포렌식이란 스마트폰, PC, 노트북 등 각종 저장매체 또는 인터넷 상에 남아 있는 각종 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범죄 단서를 찾는 수사기법을 말합니다. 즉 범죄수사에서 적용되고 있는 과학적 증거 수집 및 분석기법의 일종으로서, 각종 디지털 데이터 및 통화기록, 이메일 접속기록 등 정보를 수집·분석하여 DNA·지문·핏자국과 같은 범행 증거를 확보하는 기법인데요. 일선에서는 디지털 포렌식이 사이버범죄뿐만 아니라 대부분 수사과정에서 활용되는 만큼, 이제는 디지털 포렌식이 없으면 수사를 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입니다. 디지털 포렌식의 개념을 보다 쉽게 알기 위해서는 실제 수사에서 활용됐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 최대 다단계 사기사건으로 회자되는 ‘조희팔 사건’ 당시 그 일당들은 범죄 수익이 오고 간 흔적과 관련 내용이 저장된 서버 내 디스크를 모조리 포맷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데이터베이스(DB) 서버는 30회 이상 덮어쓰기를 반복하며 아예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를 만든 뒤 도주했었는데요. 그러나 수사팀은 웹 서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DB에 저장됐던 파일의 일부를 찾아냈고, 디지털 포렌식 기법을 통해 파편을 모으듯 자료를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좀 더 쉽게 와 닿을만한 예로는 뉴스에 종종 나오는 몰카 사건이 있습니다. 여름철 해수욕장이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등지에서 스마트폰, 디지털 카메라, 초소형 카메라 등을 이용해 타인의 은밀한 신체부위를 촬영하다 검거됐다는 뉴스를 한 번쯤 보셨을 텐데요. 만약 범인이 검거되기 전 황급히 삭제한다고 해도 디지털 포렌식 기법을 통해 증거 복구가 가능합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71403001&code=940202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233096 http://blog.naver.com/it-is-law/221055952761 예전 포스팅을 통해, 이별범죄나 데이트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법적 대응 방안에 대해 알려드린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더러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므로, 경찰 신고, 형사고소,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등 단호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요지였는데요. 다만 범죄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통화 내용을 녹음한다거나 문자메시지를 저장해둔다면 유용한 증거로 쓰일 수 있을 것이며, 만약 폭행·협박·강간 당시의 동영상·사진이 있다면 보다 확실한 입증자료가 될 것입니다. 동영상·사진을 찍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몰래 녹음을 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어렵게 수집한 증거들이 가해자에 의해 강제로 삭제된다고 해도 증거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소송대리를 맡아 진행했던 사건에서도, 가해자가 주요 증거들을 부수거나 삭제해버리는 바람에 범죄가 성립하지 않을까 우려하셨는데요. 그런 경우에도 앞서 말씀드린 디지털 포렌식 기법을 통해 증거를 복원함으로써 범죄 입증이 가능합니다. 물론 보다 확실한 복원을 위해서는 자료가 더 훼손되기 전 신속히 디지털 포렌식을 진행해야겠죠.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1/27/0200000000AKR20161127050500004.HTML?input=1195m 아울러 SNS나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명예훼손 사건에서도 디지털 포렌식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작년 혐오범죄 논란을 낳았던 워마드패치, 오메가패치 등 사건 당시 경찰은 디지털 포렌식 기법을 통해 증거를 확보했었는데요. 따라서 SNS 등에서 명예훼손을 당한 경우 피해자는 우선 화면 캡쳐 등을 통해 자료를 확보해둘 필요가 있으며, 만약 가해자가 관련 자료를 삭제한 뒤 혐의를 부인한다 해도 디지털 포렌식을 통해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디지털 기기와 항상 접해 있는 현대인의 생활 특성상, 각종 범죄의 증거가 디지털 형태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범행을 숨기기 위해 그 정보를 삭제했다 해도 복원이 가능한 경우가 많으니 형사고소 등 적극적 대응을 통해 피해를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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